
슈마리나이 댐공사 당시 사진
1976년,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파(本願寺) 승려 도노히라 요시히코는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낸 쿄토를 떠나 고향 홋카이도 후카가와시(深川市)로 돌아옵니다. 그 해 여름, 학교 교사와 시민 등이 모여 만든 ‘소라치(空知) 민중사 강좌’ (당시 명칭 ‘소라치 민중사를 말하는 모임’) 에서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朱鞠内) 지역 댐 공사 희생자 유골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는 1976년부터 조선인 강제연행, ‘타코베야(タコ部屋-문어방이란 의미로 강제노동에 동원된 일본인, 조선인 등의 집단수용소를 지칭)’ 노동을 조사하고 희생자 유골 발굴을 계속 해온 주체입니다. 모임 결성 총회에서 그는 재일조선인 채만진과 이종석를 만납니다. 그들로부터 바로 그 지역을 포함한 곳곳에서의 조선인 강제 노동과 암매장 증언을 숨 죽이며 듣습니다. 같은 해 9월, 동료 승려들과 함께 슈마리나이의 ‘광현사(光顕寺, 현 사사노보효 전시관)’ 본당에 안치되어 있던 70여 개의 위패와 마주칩니다. 인수자가 없이 사찰에 안치 중인 위패는 지역 댐과 철도 공사 희생자의 이름 이였고, 그 중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들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위패 이름과 조우한 뒤, 희생자 유골 발굴의 구상이 논의됩니다. 채만진의 아들 채홍철의 제안에서 돌아가지 못한 망자(亡者)들의 주소지로 이른바 ‘죽은 자의 편지’를 발송하자 그에 대한 기대치 못한 답장들이 그들의 친족으로부터 속속 도착합니다. 조릿대 숲 속 아래 깊숙이 묻혀있을 유골을 방치한 채 재차 답장을 쓸 그 어떤 염두도 나질 않았습니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를 중심으로 하여 유골 발굴을 계획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