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18일~20일(한국) <70년만의 귀향>
“2015년 올해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로부터 해방된 지 70년을 맞이하는 해입니다. 일본의 양심적인 종교인, 학자, 청년들과 함께 유골발굴을 시작한지도 벌써 18년이 되어갑니다.
그동안 강제노동 현장에서 희생된 분들의 유골을 유족과 고향의 품으로 모셔오고자 하는 움직임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고령의 유족들은 점점 나이가 들어 세상을 떠나는 분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희생자 유골을 직접 발굴하고 그 유족들을 찾아 온 저희들은 올해 추석까지 한국으로 유골을 모시고 와서 정식으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고향 땅에 안치하고자 합니다.
희생자와 그 유족들에게는 ’70년만의 귀향’이 마침내 실현되는 올 추석이 될 것입니다.”
– 다음 뉴스 펀딩 <70년만의 귀환> 홋카이도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귀환 중 1화 내용 발췌
홋카이도 히가시카와 에오로시 발전소(800여 명 동원)와 유수지 공사(1170여 명 동원)에는 다수의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가 동원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 유해 방치 사실에 대한 지역 주민의 증언이 존재해 왔고, 증언을 바탕으로 현장의 유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습니다.
처음 증언을 토대로 발굴지로 정한 곳은 한 숲 속이었습니다.
크게 뻗은 나무들 사이에 조릿대가 빼곡한 숲 속을 직접 본 증언 주민이, 매장지는 숲 속에서 조금 떨어진 숲 속에 난 조그만 비포장 도로일 가능성이 더 높다는 새로운 증언에 따라, 발굴지가 비포장 도로로 바뀌게 됩니다.
발굴지가 좁은 도로라는 특성 상 많은 참가 인원이 한꺼번에 작업을 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돌아가며 발굴 작업을 한 결과, 유골 대신 유골을 넣어 매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상자의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유골은 도로를 만드는 과정에서 유실됐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에오로시 발전소・히가시카와 유수지 공사에 동원된 유골 발굴
홋카이도 히가시카와 에오로시 발전소(800여 명 동원)와 유수지 공사(1170여 명 동원)에는 다수의 조선인, 중국인 노동자가 동원되었다.
당시 조선인 노동자 유해 방치 사실에 대한 지역 주민의 증언이 존재해 왔고, 증언을 바탕으로 현장의 유골 발굴 작업이 진행되었다.
일본은 1943년부터 1945년까지 북방방위계획의 일환으로 홋카이도 소야군 사루후쓰촌 근처의 아사지노, 오니시베쓰 및 사할린에 비행장을 건설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아사지노 비행장에는 빠른 완공을 위해 목판으로 된 활주로가 설치되었습니다.
비행장 건설을 위해 강제 연행된 조선인 중 수백 명이 배고픔과 가혹한 노동 및 전염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의 유해는 비행장 근처 구 아사지노 공동묘지에 묻혔습니다.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에서는 2006년과 2009년에, 홋카이도 사루후쓰촌 근처 아사지노 비행장 부근에 자리한 공동묘지 일원에서 발굴 작업을 했습니다.
이 지역에서는 2005년 시굴조사에서 1 구의 유해가 수습되었고, 2006년에는 12구의 유해가 발굴되었으며, 2009년에는 7구의 유해가 수습되었습니다.
유골들은 근처 하마돈베쓰의 사찰, 텐유지에 안치되었습니다.
2010년에는 구 공동묘지에서 3차 유골 발굴 작업을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4월 30일부터 5일까지 발굴 작업을 했습니다.
2010년 발굴에서 4구의 유골을 발굴했고, 2010년까지 총 3차에 걸친 아사지노 비행장 건설 희생자 유골 발굴 작업을 거쳐 최대 39구의 유골을 발굴했습니다.
특히, 2010년 확인된 유골 한 구가 온전한 모습으로 발견되었습니다. 아사지노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유해를 둘러싸고 있는 나무의 흔적(목질흔)이 확인되어 유해가 나무상자에 넣어졌음이 밝혀졌습니다.
발견 당시 모습으로 볼 때, 시신을 정사각형의 나무상자에 굴장(屈葬: 시체를 매장하는 방법의 하나. 시체의 팔다리를 굽혀 쭈그린 자세로 매장한다. )형태로 넣어 매장한 것으로 보였습니다.
유골 발굴 이후, 발견된 유해의 신원확인을 위해서는 강제 연행된 조선인 노동자가족의 소재 여부가 먼저 해결되어 유가족의 DNA 샘플을 확보해야 한다는 과제가 남았습니다.
2004년 6월, 비바이시 토메이의 절 죠코지에 무연고자 공양비에 잠들어 있는 유골 34구 중, 6구의 유골함에 조선인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지역 향토사 연구가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그 후, 홋카이도 포럼도 조사에 참여, 절을 통해 한국 정부 위원회에 희생자들의 신원을 밝혀줄 것을 요구합니다.
이후 6구의 본적과 사망일이 새롭게 알려졌지만,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죠코지에 안치된 유골은, 1941년 미쓰비시 탄광 갱 내 가스 폭발 사고로 희생된 조선인이었습니다.
폭발 사고로 인해 통동 갱(주요 갱) 입구가 물이 유입되어 봉쇄되어, 현재도 53명(그 중 조선인은 14명)의 유해가 땅속에 그대로 남겨져 있습니다.
미쓰비시 탄광의 사원이었던 죠코지는 , 폭발 사고로 인해 갱 내외에서 죽은 이의 추도와 함께, 앞서 밝힌 사고 희생자의 유골을 소중히 안치해왔습니다.
그 유골은 전후 탄광 폐광으로 인해 현재 위치로 이전된 후에도 새로운 주지 스님들에 의해 안치되어 왔고, 희생자들의 기록을 전하고 있습니다.
1997년부터 2001년 이전까지의 발굴 워크숍은 정병호 선생과 도노히라 선생을 공동대표로 하는 위원회와 민중사 강좌의 주최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후 매년 개최된 워크숍을 통해, 이번에는 젊은이들에 의한 위원회가 운영되었고, 민중사 강좌가 뒤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명칭도 “동아시아 공동 워크숍”으로 고치면서, 그 외연을 한-일 관계에서 더욱 넓혔습니다.
2001년은 일본의 교과서 문제,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 등으로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관계가 악화된 상황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굴을 위해 많은 젊은이들이 삿포로의 니시 혼간지 삿포로 별원에 모였습니다.
슈마리나이 공동 묘지 주변을 발굴하던 중 유골이 발견되었습니다. 다리를 구부린 채 앉아있는 모습이었습니다.
한 변이 50센티 정도의 상자에 들어있는 모습으로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몽당 연필이나 “진탄”마크가 들어간 3센치 정도의 작은 그릇, 벨트 버클 등도 함께 나왔습니다. 불교, 기독교, 아이누식, 유교식으로 사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도식이 거행되었고, 종교가 없는 사람을 위한 추모의 시간도 가졌습니다.
또 다른 곳에서도, 병 등 쓰레기로 밖에 볼 수 없는 것들에 섞여, 두개골의 일부가 나왔습니다.
발굴을 마치고 최종 보고에서, 2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보고했지만, 이제까지의 정황으로 봤을 때 3구, 또는 그 이상일 가능성이 있다는 판단을 내리게 됩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은 오래 전부터 니시혼간지에 강제연행 되어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함이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1999년 2월, 스님은 사찰 측에 조사를 신청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월에서야 유골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곧 니시 혼간지 홋카이도 교단에서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2년 동안 조사를 벌인 결과, 이름, 본적 등이 기록된 한국, 일본, 북한,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101명의 희생자명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골들은 이전에 어느 기업이 보관하고 있다가, 그 회사가 도산하면서 절에 맡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골을 보관해오던 사찰 측에서는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가, 잘못해서 1997년에 유골들을 한꺼번에 섞어서 보관하게 됩니다.
이 중 조선인의 유골은 70여 구 정도로, 홋카이도에 강제 연행 된 사람들임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이후 니시 혼간지 삿포로 별원에서는 유골이 섞인 것에 대한 사죄와 함께 이후 유골들을 고향 땅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조사 끝에 신원이 확인 된 한 분의 유족과 연락이 닿아, 그간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유족을 홋카이도에 모셔오게 됩니다.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은 오래 전부터 니시혼간지에 강제연행 되어 희생된 사람들의 유골함이 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1999년 2월, 스님은 사찰 측에 조사를 신청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2월에서야 유골함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곧 니시 혼간지 홋카이도 교단에서 조사위원회가 결성되어 2년 동안 조사를 벌인 결과, 이름, 본적 등이 기록된 한국, 일본, 북한, 중국 등 다양한 국적의 101명의 희생자명부가 발견되었습니다.
이 유골들은 이전에 어느 기업이 보관하고 있다가, 그 회사가 도산하면서 절에 맡긴 것이라고 했습니다.
유골을 보관해오던 사찰 측에서는 유골을 보관하고 있다가, 잘못해서 1997년에 유골들을 한꺼번에 섞어서 보관하게 됩니다.
이 중 조선인의 유골은 70여 구 정도로, 홋카이도에 강제 연행 된 사람들임이 유력해 보였습니다.
이후 니시 혼간지 삿포로 별원에서는 유골이 섞인 것에 대한 사죄와 함께 이후 유골들을 고향 땅으로 보낼 수 있도록 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합니다.
조사 끝에 신원이 확인 된 한 분의 유족과 연락이 닿아, 그간의 일에 대해 설명하고, 유족을 홋카이도에 모셔오게 됩니다.
90년대가 지나며 동아시아 민중 간의 교류가 확장되기 시작하고 그 결실로, 1997년 본격적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한일공동워크숍이 일본 홋카이도 우류군 호로카나이쵸 슈마리나이 지역에서 열리게 됩니다.
재일조선인, 한국인, 일본인 신분의 젊은이들이 공동으로 참가하여 직접 전시 하 댐, 철도 공사에 동원된 조선인, 일본인, 중국인 등의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을 발굴하는 작업이었습니다. 노동과 집단매장이 이루어진 시간의 표면이 드러납니다. 100명이 넘는 동아시아의 젊은이들이 합숙과 노동을 함께하며 삽을 들고 공동묘지 인근의 대숲을 파 내려갑니다. 드디어 말 없는 유골과 조우합니다.
80년대 땅 속의 유골이 새로운 동시대와 대면한 후 새롭게 쌓인 15년의 시간 동안 남아있던 두개골의 형태는 잘게 썩고 분해되어 흩어져 있었습니다. 발굴된 유골 총 4구. 이 중 2구는 일본인 희생자 확인되며, 1구는 조선인 희생자일 가능성을 확인합니다. //

97년 발굴 당시. 유골이 구겨진채 매장된 것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병호 선생은 박사 논문을 위해 홋카이도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하던 1989년 가을, 그 곳에서 도노히라 요시히코 스님과 만나게 됩니다. 그
는 도노히라 선생으로부터, 그 곳 산중의 댐 공사 현장(우류댐)에서 일제의 강제연행으로 끌려 온 조선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스님은 희생된 분들의 유족을 찾아 그 유골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거듭 이야기했습니다.
하얀 자작나무 숲 속 무성한 조릿대 더미 밑 어딘가에 아직도 많은 희생자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설명을 듣고, 정병호 선생은 그 자리에서 스님과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면 고고학 훈련이 된 학생들과 함께 와서 땅 속에 묻혀있는 그 유골들을 발굴하고, 억울한 희생의 역사적 진실을 다음 세대와 함께 밝히겠다”고.
정병호 선생은 박사 논문을 위해 홋카이도에서 현지 조사를 진행하던 1989년 가을, 그 곳에서 스님인 도노히라 요시히코 선생과 만나게 됩니다. 스님으로부터 그 곳 산중의 한 댐 공사 현장(우류댐)에서 일제의 강제연행으로 끌려 온 조선 사람들이 많이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듣게 됩니다. 스님은 희생된 분들의 유족을 찾아 그 유골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거듭 이야기했습니다. 하얀 자작나무 숲 속 무성한 조릿대 더미 밑 어딘가에 아직도 많은 희생자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는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스님과 한 가지 약속을 하게 됩니다. “한국에 돌아가 교수가 되면 고고학 훈련이 된 학생들과 함께 와서 땅 속에 묻혀있는 그 유골들을 발굴하고, 억울한 희생의 역사적 진실을 다음 세대와 함께 밝히겠다”고.

슈마리나이 댐공사 당시 사진
1976년,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혼간지파(本願寺) 승려 도노히라 요시히코는 자신이 학창시절을 보낸 쿄토를 떠나 고향 홋카이도 후카가와시(深川市)로 돌아옵니다. 그 해 여름, 학교 교사와 시민 등이 모여 만든 ‘소라치(空知) 민중사 강좌’ (당시 명칭 ‘소라치 민중사를 말하는 모임’) 에서 홋카이도 슈마리나이 (朱鞠内) 지역 댐 공사 희생자 유골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는 1976년부터 조선인 강제연행, ‘타코베야(タコ部屋-문어방이란 의미로 강제노동에 동원된 일본인, 조선인 등의 집단수용소를 지칭)’ 노동을 조사하고 희생자 유골 발굴을 계속 해온 주체입니다. 모임 결성 총회에서 그는 재일조선인 채만진과 이종석를 만납니다. 그들로부터 바로 그 지역을 포함한 곳곳에서의 조선인 강제 노동과 암매장 증언을 숨 죽이며 듣습니다. 같은 해 9월, 동료 승려들과 함께 슈마리나이의 ‘광현사(光顕寺, 현 사사노보효 전시관)’ 본당에 안치되어 있던 70여 개의 위패와 마주칩니다. 인수자가 없이 사찰에 안치 중인 위패는 지역 댐과 철도 공사 희생자의 이름 이였고, 그 중 조선인으로 추정되는 이름들을 곳곳에서 발견합니다. 위패 이름과 조우한 뒤, 희생자 유골 발굴의 구상이 논의됩니다. 채만진의 아들 채홍철의 제안에서 돌아가지 못한 망자(亡者)들의 주소지로 이른바 ‘죽은 자의 편지’를 발송하자 그에 대한 기대치 못한 답장들이 그들의 친족으로부터 속속 도착합니다. 조릿대 숲 속 아래 깊숙이 묻혀있을 유골을 방치한 채 재차 답장을 쓸 그 어떤 염두도 나질 않았습니다. 소라치 민중사 강좌를 중심으로 하여 유골 발굴을 계획합니다. //